The Korean Journal of Community Living Science
[ Article ]
The Korean Journal of Community Living Science - Vol. 32, No. 1, pp.71-93
ISSN: 1229-8565 (Print) 2287-5190 (Online)
Print publication date 28 Feb 2021
Received 29 Aug 2020 Revised 20 Oct 2020 Accepted 25 Oct 2020
DOI: https://doi.org/10.7856/kjcls.2021.32.1.71

성인자녀와 사별한 대리양육가정 조부모의 손자녀 양육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

박혜지 ; 이정화, 1)
전남대학교 사회복지학협동과정 박사과정
1)전남대학교 생활복지학과 교수
A Phenomenological Study for Grand-parenting after Adult Children’s Death
Hyeji Park ; Jeonghwa Lee, 1)
Ph.D. Student, Dept. of Social Welfare, Chonnam National University, Gwangju, Korea
1)Professor, Dept. of Family Environment & Welfare, Chonnam National University, Gwangju, Korea

Correspondence to: Jeonghwa Lee Tel: +82-62-530-1326 E-mail: jhlee2@jnu.ac.kr

This is an Open-Access article distributed under the terms of the Creative Commons Attribution Non-Commercial License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3.0) which permits unrestricted non-commercial use, distribution, and reproduction in any medium, provided the original work is properly cited.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ore the essence and the meaning of the elderly's experience of adult-child bereavement and raising grandchildren. Also, this study suggests a better social support system for grand-parenting. To achieve the goals of this study, it has chosen a qualitative research method, especially Giorgi's phenomenological approach method, which can be best used in understanding the essence and meaning of the experiences of research participants. Data collection for this study was conducted through in-depth interviews with 11 elderly people who lost adult children, which resulted in a care-giving burden in raising their grandchildren. The analysis from the statements consists of 8 components. The 8 components are‘Buried at sea by Fatalistic Punishment’, ‘Withdrawn from the Society with Inner Agony’, ‘Encountering People who want to help Me’, ‘Escaping in a Deep Sea and Finding Meanings’, ‘Children who came to me Inevitably’, ‘Struggling with Them’, ‘Making a Die-game through Storms of Life’ and ‘Circulating Lives for Nourishing the Land’. Participants in the study, who were faced with the pain of their own child's death and the difficulties of raising grandchildren, are free from pain through the existence of their grandchildren and the helpful network. Likewise, they gain meaning to live through a mutual dependence with their grandchildren and have a second chance to live on as parents again. Research findings suggest that customized supports for foster parents community, conducting public campaign to reduce social prejudices, emotional coaching for a better family communication, parenting skill education for foster parents, initial intensive intervention after entering the protection system, stable economic support, qualitative case management, and vitalizing of foster-care service.

Keywords:

adult child bereavement, raising grandchildren, social support for foster care parents, giorgi’s phenomenological study

I. 서론

유엔아동권리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CRC)에 입각하여 부모로부터 분리된 아동이 가족적인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2003년부터 가정위탁보호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가정위탁은 유형별로 대리양육위탁, 친인척위탁, 일반위탁으로 나뉘는데, 혈연관계에 의한 대리ㆍ친인척 위탁보호가 전체 가정위탁의 92%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이 중 67%는 조부모에 의해 보호받는 대리양육 가정위탁이다(Foster Care Status Report 2019). 이러한 가정위탁보호 실태를 보았을 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부모로부터 분리된 아동의 보호를 대부분 가족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조부모에 의한 대리양육위탁은 미성년 손자녀에 대한 일차적 양육책임을 조부모가 전담하는 것으로, 이때의 조부모는 부모의 역할을 전적으로 대리하는 ‘조용한 구원자, 제2의 방어선(Ahn 2012)’이라고 불린다. 위험에 처한 손자녀를 돌보아야 한다는 강한 기대가 있는 문화에서 조부모들은 양육자로서의 역할에 보다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Silverstein 2007), 한국의 이러한 혈연ㆍ가족 중심 문화는 조손세대, 소년소녀가정 등 명칭을 달리하며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손자녀를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감은 조부모의 생의 의지를 강하게 하고 삶의 영속성(biological continuity)을 느끼게도 하였지만(Yang & Han 2013), 한편으로는 자녀가 결혼하여 독립을 하는 중노년기에 다시 양육의 책임을 지는 것이 신체적ㆍ경제적으로 부담되는 일일 뿐 아니라, 양육의 책임이 주로 조모에게 전가되어 배우자가 있는 조모의 경우 배우자 부양과 손자녀 양육의 이중부담을 겪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Kim et al. 2008).

가정위탁보호 사유 중 약 31%를 차지하는 ‘부나 모의 사망(24.3%), 부모 모두 사망(6.4%)’의 경우(Foster Care Status Report 2019), 조부모인 대리양육 위탁부모는 자녀사별이라는 충격과 슬픔을 경험함과 동시에 남겨진 손자녀 양육이라는 이중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생애과정의 진행이 순조롭지 않음으로 인해 겪게 되는 일이라는 점 때문에(Han et al. 2009) 자괴감과 수치심 등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히기 쉽고, 특히 노인은 슬픔과 관련된 정서적ㆍ신체적 고통이 경감되는 속도가 다른 대상층에 비해 더 느리므로 사별의 고통에서 헤어나오기 힘들고 애도 과정으로 인해 일상에 적응하는 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Kim 2019). 따라서 자녀 사망으로 손자녀를 양육하게 된 대리위탁부모는 떠나간 자녀에 대한 애도와 함께 ‘내 핏줄’인 손자녀를 부모로서 돌봐야 하는 ‘사회적 시간표(social timetable)’에 어긋난 과업에 직면한다.

가정위탁보호제도 안에서의 대리위탁부모는 위탁아동의 건강한 성장을 도모해야 할 ‘부모’이므로 초점이 ‘부모역할’에 맞추어져 있다. 현재 가정위탁보호체계 내에서의 실천적 지향은 ‘위탁아동의 건강한 성장’에 맞추어져 있어, 대리위탁부모가 어떠한 사유로 손자녀를 키우게 되었는지, 자식의 죽음에 대해 충분한 애도과정을 거쳤는지, 그로인해 지금 당사자의 심리ㆍ정서 상태는 어떠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을 생략한 채 주로 경제적ㆍ교육적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자녀 사망으로 손자녀를 양육하게 된 조부모는 대리위탁부모로서 심정적 어려움이 클 것으로 사료되고, 이러한 심리ㆍ정서적 힘듦이 적절히 해소되지 못하고 지속될 경우, 이는 위탁아동의 양육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 연구는 바로 그러한 반성적 인식에서부터 시작하며, 가정위탁보호정책이 아동복지의 한 줄기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가족건강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위탁아동 뿐 아니라 자녀사별 경험의 당사자인 대리위탁가정의 조부모들에게도 충분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고 그들을 돕기 위한 실천적ㆍ제도적 지향점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그동안 국내에서 자녀사별과 관련된 연구는 외국에 비해 충분히 진행되지 못하였고, 대부분 세월호 사고, 천안함 사건, 자살, 소아암 등 주로 간호 및 치료적 심리상담의 영역에서 특정 사별의 유형과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거나, ‘노인’이라는 특정 세대에 국한된 자녀사별 연구가 실시되었다. 또한 국내에서 손자녀 양육에 대한 연구는 주로 조손가족의 범주에서 진행되어 왔고, 심리학ㆍ노인학ㆍ가족학ㆍ사회복지학ㆍ아동학ㆍ교육학 등 여러 분야에서 다루어온 주제이다(Kim & Jeon 2010). 손자녀 양육에 대한 선행연구들에서 조모를 대상으로 한 연구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내용적으로는 양육스트레스, 양육행동, 사회적 지지, 심리적 경험 등에 초점을 두고 개인 삶의 질과 심리적 적응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그러나 본 논문은 일반적인 조손세대에 대한 연구에서 벗어나 자녀사별로 인한 조부모의 손자녀 양육경험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 선행연구와 차별화된 부분이다. 사회적으로 조부모의 손자녀 양육이 점차 중요해지고 양적으로도 확대되고 있으며, 실제 대리양육 가정위탁 발생 사유의 1/3을 차지하는 ‘자녀와의 사별경험’이 부모에게 매우 커다란 상실이라는 점에서, 본 연구는 성인자녀와의 사별 및 손자녀 양육 경험의 본질과 의미를 탐색하기 위해 현상학적 연구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 연구의 연구문제는 ‘성인자녀와 사별한 대리양육가정 조부모의 손자녀 양육경험은 어떠한가?’이다.


II. 연구방법

1. Giorgi의 현상학적 질적연구

질적연구는 이슈에 대한 상세한 이해를 제공할 뿐 아니라 연구참여자의 고유한 주관적 경험에 집중하여 보다 심층적인 내면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으며, 언어적 형태의 자료를 관통하여 내포된 의미를 해석하는 연구방법이다. 질적연구방법 중 현상학이란, 현상에 대한 여러 개인들의 체험에 대한 공통적인 의미를 기술하는 것으로, 연구참여자들이 체험한 경험의 본질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현상을 인지하고 느끼고 판단하는지에 대한 의미를 섬세하고 심도있게 포착하려는 시도로, 다시 말해 ‘경험을 알기 쉽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Kim 2013). 본 연구의 연구방법으로 현상학적 질적연구방법을 선택한 이유는 사회현상 속의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인식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 동안 가정위탁보호사업의 주 대상인 대리위탁가정의 ‘조부모’, 특히 자녀사별이라는 참척(慘慽)의 고통을 당한 후 남겨진 손자녀를 양육하고 계신 조부모에 대해 심도있는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므로, 그들이 자녀사별과 손자녀 양육의 과정을 통해 인식하고 경험한 구체적 내용을 파악하고 그 의미를 발견하는데 적합한 연구방법이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Giorgi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대상이 하는 경험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 현상학의 주된 주제라고 보는 기술적 현상학(descriptive phenomenology)의 형태를 제시한 학자로, Giorgi의 연구방법은 ‘괄호넣기, 직관하기, 기술하기’로 구성되어 있다. 괄호넣기는 연구자가 연구하기 전에 가져야 할 태도로, 연구 대상인 경험이 편견 없이 ‘경험되는 대로’ 사고하고, 어떤 현상에 집중하여 연구참여자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본인의 경험에 대한 것을 괄호 안에 넣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연구자의 선이해가 자료를 분석할 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판단 중지(epoche)’ 하는 것이 필요했으며, 실제 개인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편견과 가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사고하는 것은 사실 상 쉽지 않으므로, 연구참여자의 경험에 대해 수용하는 태도를 연구과정 내내 유지하고자 하였다. 직관하기는 본질적인 의미 자체가 드러나도록 자료를 분석하는 것을 뜻하며, 연구자의 직접 필사와 원자료에 대한 충분한 독해가 선행되었고, 전체 텍스트를 의미 단위별로 분해해나간 후, 참여자의 일상적 용어를 학문적 용어로 변경하면서 참여자의 경험을 일관성 있는 진술로 통합해내고 구조를 생성하는 단계를 거쳤다. 마지막은 기술하기로, 우선 중심의미를 통합하여 각 참여자의 관점에서 파악된 살아있는 경험의 의미인 ‘상황적 구조 기술’을 체계화하였다. 이때 시간적으로 선행한 자녀사별 경험을 우선 분석하고 뒤이어 손자녀 양육경험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으며, 다음으로 상황적인 기술문을 통합하여 전체 참여자의 관점에서 파악된 살아있는 경험의 의미인 ‘일반적인 구조 기술’을 하였다. 이를 통해 개별적인 것에서부터 일반적인 것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2. 연구대상자 선정

질적연구의 표본추출은 ‘적절성’과 ‘충분성’이라는 두 가지 원리를 갖추어야 하며, 따라서 질적연구에서는 연구주제와 관련된 특정상황을 경험하고 그것에 대해 풍부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연구참여자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질적연구의 표본추출 방법으로 준거(criteria) 사례선정방법, 세평적 사례선택(reputational case selection)방법을 활용하였다. 준거(criteria) 사례선정방법에 따른 연구참여자 선정 기준은 첫째, 성인자녀와 사별 후 남겨진 손자녀의 대리부모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위탁가정의 조부모이다. 둘째, 손자녀의 일차적 양육자로서 손자녀와 함께 거주하며 주된 돌봄을 제공하고 의사결정 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조부모이다. 셋째, 자녀사별과 손자녀 양육의 기간이 최소 2년 이상 된 조부모이다. 이는 연구참여자가 사별한 자녀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감정적 어려움을 최소화하고 손자녀 양육에 대한 경험을 보다 풍부하게 기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세평적 사례선택(reputational case selection)을 위해 G시의 가정위탁지원센터에 공식적 절차를 통해 본 연구의 목적과 방법을 안내하였고, 해당 기관의 사회복지사를 통해 추천 받은 조부모 11명이 최종 연구에 참여하였으며 일반적 특성은 Table 1과 같다.

Research participant

3. 연구의 윤리적 문제 및 엄격성

본 연구는 연구자 소속 학교의 생명윤리위원회(IRB)로부터 연구윤리에 대한 사전승인(IRB No. 1040198-190812-HR-081-02)을 받아 윤리적 고려사항을 충실하게 준수하며 진행하였다. 면담 시작 전 연구참여자에게 연구자의 신분과 연구의 목적, 연구 방법, 사례금 지급, 연구참여와 참여철회에 대한 자율성, 면담 내용에 대한 녹취와 출판, 비밀유지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고 개별적인 연구참여 동의서에 서명하는 절차를 거쳤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하여 각 연구참여자 관련 인적사항 및 면담 녹음파일 등의 모든 자료는 식별번호를 부여하고 잠금장치를 해두어 보관하였으며, 본 연구의 대상자가 자녀사별을 겪은 조부모들임을 고려하여 면접과정 및 이후에라도 발생할 수 있는 심리적ㆍ신체적 불편감이나 위험성에 대해 사전 안내함으로써 면접 과정의 안전성이 확보되도록 하였다.

질적연구에서의 엄격성이란 연구결과와 해석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를 의미하며, 연구자는 Lincoln & Guba(1986)가 제시한 연구의 엄격성 4가지 기준인 ‘사실에 대한 확신(credibility), 적용가능성(transferability), 일관성(dependability), 중립성(confirmability)’의 준거를 적용하였다. 이를 위해 연구자는 참여자 별 평균 2회의 대면을 통해 심층면접을 진행하면서 그들의 언어 및 표현방식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였고, 본 연구의 주제와 유사한 선행연구들을 검토하며 본 연구의 결과와 비교ㆍ대조해가는 과정을 거쳤으며, 연구방법과 자료수집 및 분석과정 절차를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파일로 문서화하여 보관함으로써 다른 연구자들도 이와 연관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연구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복지학 교수 1인, 질적연구를 수행한 연구자 2인을 통한 교차검증을 하였고, 연구참여자와의 면담과정을 그대로 녹음하여 실제 현장과 상황을 왜곡하지 않고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III. 연구결과

1. 자녀사별 및 손자녀 양육의 상황적 구조기술

1) 자녀사별 경험에 대한 질적 분석

(1) 대범주 Ⅰ: 운명적 형벌로서 수장된 나

자녀사별 경험과 관련해 연구참여자들이 공통적으로 드러낸 정서는 ‘그리움과 미안함’이었으며, 참여자 모두 자녀 사별의 아픔은 살아 있는 동안 지속될 ‘운명적 형벌’과 같은 것이었다. 죽은 자식의 어린시절 모습부터 파노라마처럼 스치는 상황에서, 절절한 그리움은 참여자들을 ‘어쩔 수 없이 살아가게’ 함으로써, 상실 앞에 나약하고 무력한 인간으로 만들었고, 이러한 감정은 ‘죄책감’과 연결되어 부모로서의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놈 병원비 번다고 일 하면서도… 다 소용없는 일이여. 지금은 그놈을 병간호 해주고 했으면 쪼깐(조금)이라도 더 살았을라나 해. 못해준 것만 걸리지.” (참여자 K)

자녀 사별 직후 오히려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세월이 가면서 자식 모습이 더욱 선명해져 힘들어짐으로써 ‘지연된 애도’의 전형을 보이는 참여자도 있었다. 그는 ‘엄부자모’의 유교적 가치관으로 자녀를 매우 엄격하게 대해왔던 사례로, 그가 살아온 가부장적인 문화 경로는 충분한 애도를 위한 감정의 표현으로부터 스스로를 억압하며 ‘억제된 애도’의 형태도 띠고 있었다.

연구참여자들은 자녀 사별 후 정신적ㆍ신체적ㆍ경제적ㆍ영적 고통을 받으며 참척의 모진 할큄에서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더욱 자신을 학대하고 내동댕이치는 상황들을 연출하면서 자식 잃은 나의 죗값을 스스로에게 물리고자 하였다.

“죽지 못해 살았지요. 같이 가지 못하니까… 자식 보내고 두 달 동안 물만 마시고 나도 꼭 자식 따라서 가려고. 내가 그런 일 겪고 어떻게 살아야 했는데. 물 한 모금도 안 먹고 두 달을 살아도 안 죽고 살았네요.” (참여자 H)

연구참여자 중 사별한 자식이 자살시도 및 질환 발병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감당하기 힘든 병원비가 발생하여 경제적 고통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은 ‘남에게 돈을 빌리거나’, ‘아픈 자식을 두고 일을 나가야 하는’ 상황을 만들면서 참여자들을 더욱 괴롭게 하였다.

연구참여자들은 자식과의 사별 후 ‘삶의 무너짐’을 감당하기 위해 ‘신경안정제를 먹거나’, ‘술과 노름에 빠지거나’, ‘죽기 살기로 일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고통의 시간들을 버티고자 애썼지만, 결국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는 상황은 나를 ‘해골로 만들었고’, ‘고향땅 도처에 있는 죽은 자식의 친구들을 바라보는 것이 고통스러웠으며’, 신을 향한 걷잡을 수 없는 원망으로 인해 신실했던 ‘종교적 신념에 금이 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진짜 믿음 생활을 내 속으로는 잘 한다고 생각했어. 그러다가 우리 자식 가버리고… 이런…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막 삿대질 하고 울고 돌아다니고 그래갖고는 그 뒤로 인자(이제) 마음 아파서 교회 안 다니다가….” (참여자 D)

삶의 과정에서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일반적이고 특히 연구참여자들이 중노년기임에 따라 부모나 배우자 사별을 자식 죽음에 앞서 경험한 사례들이 많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부모 및 배우자 사별은 자녀 사별에 비해 고통이 덜 하며,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말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말하였다.

“남편 죽었을 때는 새끼들하고 살아야 되니까 눈물캥이는(눈물은 커녕) 뭣도 안 나오고. 근데 자식들이, 며느리 아들이 앞서 버리니까 너무너무 아프더라고. 남편 죽을 때는 별로 안 아팠어. 먹고 살아야지 싶으니까. 그렇게 막 가슴 치며 아플 정도는 아니었어, 그냥 어떻게 먹고 사나, 그 생각….” (참여자 D)

(2) 대범주 Ⅱ. 발이 묶인 채 더욱 침잠해 감

연구참여자들은 자식을 앞세운 것에 대해 부끄러움과 수치를 느꼈으며 그로인해 점차 사회적 관계가 축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자녀사별의 사실을 타인에게 말하지 않음으로써 ‘치부’라고 여기는 부분이 사람들로부터 회자되지 않길 바라였고, 그 과정에서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러한 표현의 억압은 가족 내부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가족원들의 불협화음은 연구참여자들로 하여금 또 다른 걱정거리를 안겨주며 자녀사별 이후 내면적 고통에 머물러 있던 연구참여자들이 본인을 추슬러 시선을 밖으로 돌렸을 때 또 다른 범주의 고통에 직면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놈 죽었을 때 이웃집 알까 싶어서. 쥐도 새도 모르게 형제간들 친척들만 장례식에 불렀어. 지금까지도 모르는 사람은 몰라 그 정도로 했어. 창피하지. 뭔 죄가 많아서 자식을 먼저 보냈는가 싶어.” (참여자 I)

나의 장례식이 아닌 자식의 장례식을 치르며 부끄러움으로 ‘거기 온 사람들에게 말도 못하고 쳐다도 못 본’ 연구참여자는, 자식 사별의 이야기를 타인에게 꺼내고 싶지 않아 바깥에 일부러 안 나가고 모임에서 탈퇴하는 등 고의적으로 사회적 관계를 축소시키는 모습이 보였다.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축소는 연구참여자로 하여금 ‘외로움’을 야기하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옛날에는 막 친목계니 갑계니 정계니 뭔 계니… 내가 장사할 때는. 근데 이제는 다 필요 없어. 다 이렇게 차단되어 버렸지. 어디 가서 깔깔 웃고 맛있는 거 먹고 그러기 싫었어. 아들 죽고 그런 게 싫었어. 내가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까 뭣이 좋아서… 내가 내 자신을 가둬버린 것 같아. 자식 앞세우고 뭣이 좋아서 니가 그러냐… ” (참여자 D)

한편, 연구참여자들의 자녀 잃음은 손자녀에게 있어서는 ‘부모’라는 생의 가장 의미있는 사람과 이별하는 과정이며, 이에 대해 연구참여자들이 손자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가엾음’이었다.

“한번은 초등학생 때 선생님한테 그랬답니다. 너는 뭣이 되고 싶냐, 그러니까 나는 아무 것도 되기 싫고 빨리 죽고 싶어요. 왜 죽고 싶냐 했더니 우리 엄마한테 가려고요. 죽으면 자기 엄마한테 갈 줄 알고. 그럴 정도로 어린이의 가슴에 멍이 들어 있는 애야. 참 가슴 아픈 일인 거지.” (참여자 G)

연구참여자 공히 사별자에 대한 이야기를 손자녀와 나누지 않는다고 말하였고, 손자녀 또한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꺼내지 않거나’, ‘잘 안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가족 내에서 사별자에 대한 이야기꺼냄을 금기하는, 보이지 않는 규범이 된 것처럼 보였다. 특히 청소년기 손자녀들은 사별한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더욱 꺼려하였는데, 이는 자식 잃은 조부모를 배려하는 차원이라고 연구참여자들은 인식하고 있었다. 건강한 애도를 위해 ‘사별한 자녀가 부모의 삶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재정리하고, 기일이나 기념일을 지키고, 또는 기억할 수 있는 물건 등을 통해 사별자와의 지속적인 연결감을 가지며, 특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별한 자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사별한 자녀와 유대감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Lee et al. 2017)’ 임에도, 가족 안에서조차 충분한 애도 경험을 하기 힘든 상황을 보여주며, 연구참여자들의 감정 숨김은 손자녀 뿐 아니라 다른 가족들에게도 전염되어 죽음의 세계로 건너 간 사별자는 구체적 형태를 잃은 채 연기처럼 가족 주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한편, 특정 가족원의 죽음 이후 남겨진 가족 관계에서 갈등이 발생한다는 선행연구(Kim 2019)와 마찬가지로 본 연구에서 드러난 가족 간의 불화는 크게 3가지 유형이었다. 첫째는 사별자를 생전에 더 잘 챙기지 못하였음을 서로 탓하며 사별자의 형제지간에 발생하는 갈등이다(참여자 B). 둘째는 자식 죽음의 원인을 자식 부부 간의 불화로 결론지으며 손자녀 양육 책임을 둘러싼 생존 부모와 조부모 간 발생하는 갈등이다(참여자 C, J, K). 셋째는 생존하고 있지만 ‘자기를 버리고 간’ 한쪽 부모에 대해 손자녀가 느끼는 내적 갈등과 미움이다(참여자 B, F).

특히 손자녀 양육 책임을 둘러싼 연구참여자와 손자녀 생존 부모와의 갈등은 손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부정적 사건들을 야기하고, 손자녀 앞에서 생존 부모에 대한 비난과 험담을 하게 함으로써 손자녀가 생존 부모에 대해 양가감정을 갖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자녀사별 후 사회적 관계의 축소, 남겨진 가족들의 불화를 경험하면서 연구참여자들은 사별 자체의 사건 뿐 아니라 확장된 고통의 굴레에 직면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래갖고 즈그(저희) 어메한테(엄마한테) 전화를 했죠. 어쩐 일이냐고. 그랬더니 저더러 애기들 좀 맡아주라고 그래요. 그래서 뭐 때문에 그러냐. 애기들 데려다 주기 전부터 남자가 있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도둑도 빠르다, OO아(며느리), 아직은 애기들이 니 손이 많이 필요할 때인데. 니가 좋은 사람이 생겨갖고 간다한들, 내가 어떻게 붙잡겠냐 만은. 아직은 애기들 돌봐야할 시기 아니냐. 조금만 더 키워주라. 사정을 했어도 전혀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가버립디다. …아주 능구렁이 굼벵이 같아갖고….” (참여자 D)

(3) 대범주 Ⅲ. 나를 건져주려는 이들과 조우함

가족은, 연구참여자들이 자녀사별 직후 고통의 그늘에 머물러 있을 때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위치하면서 식사, 잠자리 등을 챙겨주는 도구적 지원을 하였고, 그 뿐 아니라 연구참여자의 심리 상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연구참여자의 안위를 살핀 정서적 지원자이기도 하였다. 가족의 지지는 추후 연구참여자들이 손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도 그 어떤 사회적 지지체계보다 도움되는 요소였으며, 특히 중노년기의 연구참여자들에게 있어 이미 애착이 형성되어 있는 가족의 관심과 지지는 심리적 안정감을 갖게 하고, 고립으로부터 참여자들을 구조하며, 참여자들의 ‘도움 관계망(Han et al. 2008)’으로서 긴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연구참여자들에게 가족 외의 지지체계는 이웃, 종교, 사회복지기관 등이 거론되었다. 이웃은 지리적 근접성을 기반으로 하는 관계로, 참여자 K는 한 지역에 오래 머물며 ‘친구’가 된 이웃들과 어울려 유쾌한 시간을 갖는 것이 스스로 ‘마음을 푸는’ 방법임을 터득하였다.

“25년 전에 입주할 때 들어왔으니 아는 사람이 많아. (예전에는) 어디 가서 사람 거시기 할지도 모르고(사귈지도 모르고). 오로지 새끼들만 보고 먹이고 살았어. 이제는 그렇게 살 것도 아니고 이제 마음을 풀기 위해서 놀러도 가고 누가 술 한잔 먹자고 하면 나가서 어울리기도 하고. 그렇게 해.” (참여자 K)

또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연구참여자의 경우 종교가 심리적 지지체계의 요소로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내면지향적이고 가치지향적인 삶의 태도를 갖는 중노년기 세대에게 있어 종교가 갖는 긍정적 의미를 보여주는 예이다.

“나는 한 해 두 사람이 가버렸으니 어쩌겠어. 그런 말을 어디다 다해. 나보러 막 OO교(종교) 사람들이 와서 그래. 절대 딴 마음 먹지 말고 마음을 굳게 먹고 좋은 뜻으로만 생각하고 있으라고. 항시 와서 그렇게 위로를 해.” (참여자 A)

사회복지기관을 통한 도움은 구체적으로 ‘자살 유가족 자조모임에 참여함’과 ‘사회복지사의 따뜻함과 안부 챙김’으로 나타났다. 특히 자녀의 자살 사고 후 자살 관련 기관에서 먼저 연락을 주어 자조모임에 가입하게 된 참여자 B는, 현재 모임의 장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적 직책을 맡게 되는 기회를 가짐과 동시에 자신의 상처를 드러냄으로서 비로소 타인의 상처에도 눈길을 보내는 확장된 시야를 갖게 되었다.

“사람들이 그래. 그걸(마음 속 상처) 안 벌리려고 그래. 절대 똘똘 뭉쳐가지고. 그럼 더 병이 되지. …사람이 가슴에 (아픔을) 발산을 못하면 힘들지. 거기 모여가지고 서로 이야기 들어보고 얘기도 해주고. 괜찮은 것도 같애. (자살자가)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있고. 자식 보낸 사람들은 거의 우리 마음 같다고 봐야지. 더 마음이 가지.” (참여자 B)

그러나 타인의 반응 중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심경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발언들도 있었는데 참여자 J는 ‘그만 잊어버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심리적인 힘듦을 느꼈고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선행연구에서는 ‘직접적인 조언을 하거나 회복을 독려하는 것, 억지로 쾌활한 태도를 권유하는 것은 오히려 상실을 경험한 이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Lee et al. 2017)’이라고 하였으며, 사별 유가족을 애써 위로하는 말 대신 그저 곁에 머물며 작은 것이라도 실질적이고 도움되는 일을 대신하는 것이 오히려 유가족에게는 더욱 특별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4) 대범주 Ⅳ. 심해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의미 찾기

연구참여자들은 가족 및 사회적 지지체계의 도움을 통해 사별의 고통에서 스스로를 일으켰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사별 경험을 통한 ‘의미’들을 나름대로 찾아나갔다. 자녀사별 경험은 그 어떤 상실보다 고통스럽고 빠져나올 수 없는 심해(深海)와 같은 것이었으나, 연구참여자들은 자식 죽음에 대한 개연성을 찾아나가며 합리적인 그 무언가를 찾고자 노력하였으며, 얼핏 모순되고 비합리적으로 여겨지는 참여자들의 이러한 관점은, 그러나 자녀 사별의 고통에서 당사자들을 구제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원망도 했지 우리 아버지(신). 아들이 나쁜 짓을 몇 번 해서 내 가슴을 덜컥덜컥하게 해서 더 크게 죄 지을까봐 데리고 가셨다 그렇게 생각을 했지.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위안이 됐지. 모든 것이 우리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다. 잘 되도 못 되도 아버지 뜻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지. 그러니까 이제 마음이 편해” (참여자 F)

선행연구에서는 ‘상실로부터 긍정적인 측면이나 다행인 점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은 상실로 인한 고통을 성장으로 이끌 수 있다(Lim 2013)’고 하였으며, Bonanno(2004)는 ‘상실에 직면했을 때 회복탄력성은 우리가 흔히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보편적으로 발현되는 특성’이라고 하였는데, 연구참여자들의 긍정적 사고가 상실의 고통을 딛고 다시금 생의 의지를 갖게 하는 촉진제가 되고 있었다.

한편, 가족가치관은 가족에 대한 포괄적인 태도이자 가족의 바람직성 여부를 판단하는 관념체계를 뜻하는 것으로,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는 개인보다도 집단으로서의 가족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가족주의가 내재되어 있다(Kim 2016). 그러나 연구참여자들은 자녀사별 계기를 통하여 가족의 유지를 위한 개인의 희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으로서 누리는 행복감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된다.

“큰아들한테 그런 것(자살)을 겪어놔서 (둘째)아들이 며느리하고 이런 관계가 되다 보니까 내가 살아라, 소리를 못하겠어. 참고 살아라 소리를 못 하겠어. 너라도 마음이 맞는 사람하고 하루를 살더라도 젊으니까. 마음 맞는 사람하고 행복하게 살면 좋겠다. 그런 마음 밖에 없어요.” (참여자 C)

연구참여자들에게 있어 자녀사별로부터 고통을 추스릴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동기는 바로 남겨진 ‘손자녀’의 존재였다. 자녀와 사별하기 이전부터 손자녀를 양육해왔던 참여자 A, E, F, I 뿐 아니라, 사별 후 ‘자발적 의지’로 손자녀를 키운 참여자 B, D, H는 손자녀를 돌보는 일이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인식하고 있었고, 고통 추스림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행동을 하였다. 이는 ‘유가족 자조모임에 참석하거나, 돈 많이 주는 식당일을 딱 끊어버리고 손녀들보다 늦게 나가고 빨리 들어오는 일을 택하였으며, 손녀들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자 끊었던 곡기를 찾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문득 생각하니 우리 새끼들 어떻게 될까 싶어. 어디 고아원에 넣어버리면 어쩔까 싶어요. 그때부터 누워 있다가 퍼뜩 일어나서 나 밥 좀 주라. 그래갖고는 나 마음을 이렇게 먹었어요. 나 우리 새끼들 내가 키울 것인께(것이니) 느그(너희) 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 새끼들 즈그(저희) 아버지 좋아서 그렇게 환장한 새끼들 어디 데려다 줘야(눈물) 내가 키우련다.” (참여자 H)

손자녀 양육의 개시가 상대적으로 덜 자발적이었던 참여자 C, G, J, K 또한 ‘애기들(손녀) 키우기 위해 정신 똑바로 차리며 (죽은아들) 잊고자 노력하였고, 손자를 돌보면서 (사별자를) 잊어버리고 살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하였다. 이렇듯 손자녀 양육의 자발성 여부를 떠나 ‘나의 손’이 필요한 손자녀의 존재 자체가, 자녀 사별의 깊은 상처에 매몰되어 있던 참여자들로 하여금 작고 어린 존재를 보살피며 ‘부모됨’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선한 본성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자식, 며느리) 가고 나도 우울증 걸리고 탈모증도 다 생겨버리고. 그러다가 애기들… 와… 저것들 어쩌끄나(어쩌나) 싶어갖고. 오로지 애기들 어떻게든 잘 길러야지 그거 하나밖에 없었어.” (참여자 D)

또한 연구참여자들에게 자녀 사별 후 고통 추스림의 계기가 된 또 다른 요인은 ‘일’이었다. 근로에 대한 접근은 참여자들에게 있어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첫째는 부양자였던 자녀가 죽은 후 생계를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경우이고, 둘째는 일을 통해 사별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잊기 위해 시작한 경우이다. 생계를 위해 일을 시작한 경우, 초반에는 근로가 ‘부담’으로 느껴지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참여자들에게 있어 ‘일’은 사별한 자식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도구가 됨에는 틀림없었고, 일 하며 버텨낸 지난 시간들에 대해 ‘잘 참고 견뎠다’며 스스로를 격려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그렇게 돼 갖고(눈물). 그래서 아무것도 묵도(먹지도) 못하고… 그때 12월에 그랬으니까 그 다음 해… 어찌께(얼마나) 빠져버렸는가 42, 43키로 밖에 못 나가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데. 전화가 와갖고 이만저만 해서 여기 회사에서 식당을 하나 만들려는데 내가 자네 말을 했네. 그러고 있으면 죽어버릴까 싶네. 나보고 일단은 면접을 한번 보게 가보소. 해서 면접을 봤지요. 내가 아파서 있을 때 식당일 한 것이 나한테는 큰 보람이었어요.” (참여자 C)

지금까지 연구참여자들의 자녀사별 경험에 대해 4개의 대범주로 구분하여 제시하였다. 다음은 자녀 사별 이후 손자녀 양육 경험에 대해 분석한 내용이다.

2) 손자녀 양육 경험에 대한 질적 분석

(1) 대범주 Ⅰ.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온 아이들

자녀사별을 경험한 연구참여자들이 손자녀에 대한 일차적 양육자가 되는 원인은 ‘가족응집력, 친가 중심의 유교적 사고, 생존부모의 양육기피, 손자녀에 대한 친권자 부재’의 4가지 양상으로 나타났다. 각기 다른 양상으로 연구참여자 슬하로 오게 된 손자녀는 공통적으로 ‘고이면 고인대로, 흐르면 흐른대로’ 자연스러운 성질을 갖고 있는 물과 같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연구참여자와 함께 살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 공식적인 가족 형성의 시작은 ‘결혼’이 일반적이다.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가족을 만들고 가족원들은 가족의 보존을 위해 각자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 ‘규범’이 존재한다. 그러나 자녀세대의 비규범적 가족 형성은 가족응집력의 약화를 야기하였고, 한 쪽 부모의 사망 후 생존부모에게 자녀 양육의 책임을 묻기 힘든 상황이 발생한다. 즉, 이미 오래전 부부관계가 단절되어 ‘전화 한 번도 없고 아예 연락이 안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로 인해 연구참여자들이 자녀와 사별 후 결국 손자녀에게 남은 유일한 핏줄은 ‘나’뿐이어서 자연스럽게 양육하게 된 경우(참여자 A, K)가 이에 해당한다.

“결혼도 안하고 다른 여자한테 애기 낳은 놈을 둘이나 키웠어 OO이(손녀) 엄마가. 그 엄마는 나가 버렸는데… 사우(사위) 새끼가 싸가지는 없어 솔직히. 딸 죽고 연락 한번 없었어. 전화 한 번도 없었어. 아예 연락이 안 돼.” (참여자 K)

두 번째 요인은 ‘아들의 씨’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교적 가치관이다. 연구참여자들 중 장남과 사별한 경우(참여자 B, E, F) 손자녀 양육을 ‘당연히’ 친가 쪽에서 맡는 것으로 여겼으며, 조부모의 양육권을 공고히 하고자 ‘며느리를 찾아가 양육포기각서를 받거나, 아들 죽은 장례식에 오지 못하게’ 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또한 자식이 죽은 후 남은 손자녀 양육에 대해 손자녀의 생존부모와 논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내(연구참여자) 슬하에 손자녀가 있고, 아직 젊은 며느리의 새출발을 위해서’였다. 참여자 B, E, F 모두 자식이 죽기 전 이미 자식의 부부관계가 단절되고 가정이 해체되어 있었기 때문에, 친가에서의 손자녀 돌봄은 ‘당연히 내가 키울 몫’이라는 당위성을 갖게 되었다.

“아들 죽고 내가 법정대리인 하려고 그 애기(며느리)를 만났지. 재혼해서 애들도 있고 그런다 하드만. 그때 만나서 양육포기각서를 써라. OO이(손녀)는 안 보고 나하고 OO이 작은애비하고 둘이 내려갔어. 내가 키울 거니까… 앞으로 그 놈이 크면 너를 찾을지 안 찾을지 그건 내가 잘 모르겠다. 글면서 내가 이렇게 해버리고 왔지.” (참여자 B)

그러나 손자녀 입장에서는 생존부모로부터의 ‘버려짐’에 대한 이슈가 있으며 이는 연구참여자들이 손자녀 양육 과정에서 어려움을 호소한 부분이다. 엄마를 ‘그 여자’라고 부르며 미워하는 손녀, ‘엄마 연락처도 없느냐’며 늘 엄마를 그리워하는 손자. 연구참여자들은 손자녀가 떠나간 생존부모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지만, 부모 없는 손자녀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며 자신이 양육을 맡은 것을 때로는 후회하기도 한다고 고백하였다.

“후회한적 있죠. 왜냐하면 아무리 사랑을 준다고 해도 엄마만큼 주겠어요? 아무리 엄마가 데리고 시집을 간다고 해도 내가 키운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자꾸 바깥으로 돌고 그럴 때 정이 부족한 것 같았어.” (참여자 F)

자녀 사별 후 손자녀를 맡게 되는 세 번째 요인은 생존부모의 도망감 및 양육기피이다. 생존부모가 자녀를 키우지 않는 것은 위의 두 번째 요인과 같지만, 이 경우 연구참여자가 생존부모에게 손자녀 양육을 맡을 것을 요청하였음에도 생존부모는 이에 응하지 않은 경우(참여자 C, H, J)이다. 이러한 경우 손자녀 양육은 비자발적인 성격을 띠고 시작하게 되며, 당연히 연구참여자가 손자녀의 생존부모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화남, 괘씸함’ 등 부정적이었다. 이는 손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표현되었고, 이러한 상황은 손자녀가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일체 하지 않는’ 상황을 야기하였다.

“제가 수차례 찾아가서 얘기를 했어요. 애기를 어머니가 키워야지. 아빠가 있을 때랑 애기가 다르다고 해도…. 차라리 고아원에 맡겨버리세요 그러더라고. 그래서 알았다. 세 번을 똑같은 얘길 듣고 가정법원에서 저한테 후견인 하려면 친권포기각서를 주더라고. 인감증 첨부해서 내라 하든만. 그래서 이만저만해서 이렇게 하라 한다, 했더니 가지고 오세요. 가지고 갔더니 다 준비해서 그냥 바로 딱 도장 찍어주더라고.” (참여자 J)

마지막으로 자녀 사별 후 손자녀를 맡게 되는 요인은 손자녀의 부모 모두 사망함으로써 친권자가 부재하여 조부모가 키우게 된 경우이다(참여자 D, G). 이 경우는 손자녀 입장에서 부모가 모두 사망하여 결핍에 대한 이슈가 있을 수 있으나, 다른 사례에 비해 조부모-손자녀 간 관계가 돈독하였고 가족 내부의 갈등도 보고되지 않았다. 이처럼 자녀사별 후 남겨진 손자녀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연구참여자들에게 있어 엄연한 필연성과 당위성을 갖고 시작하였으며, 그렇게 손자녀 돌봄은 ‘나의 몫’이 되었다.

(2) 대범주 Ⅱ. 함께 물에 빠져 허우적댐

손자녀의 일차적 양육자가 된 후 연구참여자들은 여러 가지 측면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이는 양육자로서의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경제ㆍ건강ㆍ교육ㆍ생활습관 등의 실제적인 어려움이기도 하고, 연구참여자 스스로 부정적 인식의 틀에 갇힘으로써 느끼는 어려움이기도 하다. 특히 연구참여자들이 공통적으로 표현한 어려움은 ‘손자녀 교육시키기’였으며, 조부모가 직접 교육시키기 어려워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과 사설 학원에 의존하는 모습이었고 이는 손자녀에게도 부담이 되고 있었다. 연구참여자들의 손자녀 교육에 대한 열의는 ‘부모가 없기 때문에 더 잘 키워야 한다’는 신념을 통해 강화되었고 소득의 상당 부분을 교육비로 지출하면서 경제적 여건을 더욱 어렵게 하기도 했다.

“내가 (교육적으로) 케어를 못 하니까. 고것(손자)이 오면 공부를 하지도 않고 그러니까 그래도 전문가들하고 있으면 좀 더 낫겠다 싶어서 한문하고 영어, 또 주산, 미술, 컴퓨터, 피아노 그렇게 6개를 보내요. …태권도를 보내야 될 것 같아요. 근데 태권도까지 가면 애가 파김치가 될 것 같아.” (참여자 J)

또한 연구참여자들이 손자녀 양육과정의 어려움으로 가장 많이 이야기한 내용은 경제적인 부분이다. 중노년기에 위치한 연구참여자들은 소득기반이 없어 수급자이거나(참여자 A, E, G, H), 근무 형태가 비정규직으로 불안정하거나(참여자 C, D), 농사 등 육체노동을 함으로써 점점 힘에 부치는(참여자 B, F, K) 상황에서, 다른 자녀의 한정적 지원과 부족한 정부지원금은 손자녀의 필요와 욕구를 충분히 채워주기에 부족한 실정이었고, 이는 자신의 노후생활과도 연결되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하였다.

“재산 같은 것도 없고… 지금도 내가 벌어놓은 게 좀 있으면 우리 애기들 키우면서 내가 살 것인데. 이 나이 먹고 (지원금에)맞춰서 살라니까… 다행히도 거기서 도와줘서 저것들 키우지 내 힘으로는 못 키우니까. 그런 것이 고맙고 감사한데 그래도 부족하니까. 내가 재산이라도 좀 많으면 느그도(손녀들) 돈의 압박도 안 받고, 나도 너희들 키우기 편할 것인데. 그게 커요. 내가 오래 살아서 누구한테 짐 될까 걱정이고….” (참여자 H)

한편, 연구참여자들에게 있어 ‘일’은 참척의 고통에서 그들을 건져낸 중요한 요인이며, 자신이 할 역할이 있다는 것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했고, 일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체적 노화가 상당 부분 진행되었고 만성질환으로 건강이 허약한 참여자에게 있어 일은 긍정적 측면이라기보다는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너무너무 아프고 힘들고. 지금도 양쪽 무릎이 다 아프고. 여기서부터(팔꿈치) 아프면 여기까지(손가락 끝) 딱 오므라져버려. 억지로 손을 펴. 펴놔야 펴지고. 뻣뻣하고 팅팅 부어갖고. 힘줄이 어쨌다나. 여기는 약도 없어. 수술을 해야 낫는 병인데, 수술을 하면 못 놀아도 한 달은 놀아야 하는데. 나이 먹어갖고 어디 써줄 데가 없어 솔직히 말해서. 누가 나를 써주겠어. 그러니 사표 안 낼라고 억지로 우기고 다니지.” (참여자 D)

연구참여자들은 사춘기가 된 손자녀가 ‘통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친구들과만 너무 어울리는’ 것에 대해 걱정하였고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말을 듣지 않는 손자녀 돌봄에 버거움을 느끼고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또한 흡연, 도벽, 폭력 등 문제행동이 외현화되면서 손자녀가 주변인과 갈등을 빚고 학교에서 낙인찍히는 상황은 연구참여자들에게 양육 스트레스를 가중시켰다.

손자녀의 문제행동에 대처하는 양상은 연구참여자들마다 달랐으며, 이는 그가 살아온 사회문화적 배경과 성격적 특성 등이 통합되어 나타나는 대처법이다. 사춘기 시기나 정서적 어려움이 있는 손자녀에 대해 중노년기의 연구참여자들 중 적절한 부모역할을 하는 것에 어려움을 호소한 경우가 있었는데, ‘담아두지 못하고 발산하는’ 성격 특성으로 손자녀에게 불같이 화를 내거나, 심하게 체벌하는 경우는 손자녀의 문제행동 감소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히려 관계의 악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나타났고, 양육자로서 진정한 권위를 획득하는데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다.

“내가 한 대 때리면 지도 달려들어서 때리려고 하는 거야 할머니를. 쥐어 팰라하고. 이것이 크면 뭐가 될까….” (참여자 J의 아내)

한편, 인터뷰 과정에서 연구참여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도 드러냈으며 특히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살아온 삶에 대해 많은 부분 이야기하였다. ‘사별한 자녀의 손녀 셋과, 이혼한 자녀의 손자 둘을 함께 키우며 복닥거리는 집에서 늘 분주하게 움직여야 하는’ 참여자 C의 삶은, 오직 가족챙김과 집안일로 점철되어 있었다.

“솔직히 지금 우리 작은 아들도 이렇게 헤어져갖고 있잖아요. 나 다섯이 키우려면 힘들어. 하루에 밥을 몇 번을 차려 아주. 이것 주라 저것 주라. 세탁기가 두 개 돌아요. (외부모임) 전혀 없어요. 친구도 없고. 집안일 하고 가족 챙기고 그것이 내 일이야. 그래서 내가 하도 답답해서….” (참여자 C)

중노년기의 연구참여자들에게 있어 가족돌봄은 주로 여성의 몫이었으며, 그러한 상황에 대해 문제의식을 표현한 연구참여자가 거의 없었던 것은 ‘여성의 가족돌봄’을 당연시하는 문화적 가치관이 체화되어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에 와서 ‘골병만 들고, 짜증스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옛날 사람이라 도와주는 거 없는 남편’을 비롯하여 가족들의 일상에 깊이 파고들어 전적으로 뒷바라지 하였던 여성, 어머니의 삶이 고단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연구참여자가 밝힌 ‘자기연민’의 내용 중에는 ‘내 자식같이 키워주지만 결국은 엄마한테 갈’ 손녀들에 대한 허망함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러한 인식은 할머니로서 ‘내 할 도리만 하겠다’는 경계를 지음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는 기제로 작용하고 있었다.

한편, 연구참여자들은 결핍된 가정환경이 손자녀 학교에서 알려지지 않도록 ‘백화점의 옷’을 사 입히며 손자녀의 외양에 일부러 신경을 쓰거나, 반대로 교사들로부터 특별한 관심을 유발하기 위해 ‘직접 농사지은 작물’을 가지고 손자녀의 학교를 자주 찾아다니는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는 조부모로서 손자녀를 잘 키워내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연구참여자 스스로 ‘할머니가 키우는 아이’라는 편견의 틀 안에서 행동한 것에 불과하기도 하다. ‘손자녀를 위해서’ 한 이러한 행동들은 ‘며느리가 손녀들 앞으로 보내 온 중고옷을 쓰레기로 여기며 모두 갖다 버리고, 친구들로 하여금 손자가 놀림거리가 되게 만든’ 결과를 야기했다.

“OO이(손자)가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했어. 애들이 같이 안 놀고 따돌림을 당하고 그랬는가 보더라고. 나는 학교를 쫓아 다녔어도 그런 줄을 몰랐어. OO이가 그러더라고. 할머니 나 전학 시켜줘. 할머니가 쫓아다니니까 그랬다대. 친구들이 놀렸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할머니가 학교 안와야 한다고 그러더라고. (침묵) 징허네(징그럽네) 사는 것이 아이고.” (참여자 A)

또한 학교에서의 문제행동으로 교사로부터 지적을 받은 손녀에 대해 ‘가정환경을 알고 약점을 잡는다’는 인식을 하는 사례와,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남들 시선’이 부끄러워 선뜻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던 사례는, 자식 죽음과 그로인한 가정 내 어려움에 대해 왜곡되고 위축된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예이다.

“선생님 좀 불쌍한 애들이니까 잘 지켜봐주시고 다독거려 주시고. 부탁을 하고 왔죠. 그랬더니 이걸로 이렇게 약점을 잡을 라고 그러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마음이 굉장히 안 좋더라고.” (참여자 C)

자식 사망으로 인한 가족의 변화는 당사자들에게 있어 ‘변화’보다는 ‘위기’로 다가왔으며 연구참여자들은 사회적 편견 속에 스스로를 가두는 이중 철창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3) 대범주 Ⅲ. 뭍으로 나가기 위한 고군분투

한편, 연구참여자들은 손자녀 양육과정의 다양한 어려움에 대응하기 위해 심리적ㆍ관계적ㆍ교육적ㆍ법적 차원의 노력을 실천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손자녀와의 긍정적 관계 유지를 위해 ‘손녀 기 살려주고자 손녀 친구들을 챙기고, 손자와 팔씨름하고 장난치며 친구처럼 친하게’ 지냈으며, 교육체계와의 접근성을 높이고자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였다. 또한 손자녀의 ‘법적 후견인이 됨’으로써 손자녀 보호자로서의 공식적 권한을 갖고자 하였고, 도벽 등 손자녀의 문제 행동에 대해 인내하고 부족한 부분을 수용하고자 참여자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노력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려니… 그러려니… 다 괜찮아지는 것이지. 내 속으로는 그러면서 크는 것이다, 그것이 크는 과정이다. 글 안하면 못 살죠.” (참여자 G)

이러한 연구참여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은 양육 초기 서로 간에 ‘적응이 어려웠던’ 상황에서 ‘그래도 없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을 갖게 하고, 손자녀의 문제행동이 ‘점점 괜찮아지는’ 상황을 가져왔다. 또한 교육적 측면의 전략으로는 ‘손녀에게 선조들에 대한 설명을 함으로써 자신의 뿌리를 알도록 전통을 가르치고, 구순의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심으로써 손자에게 살아있는 효 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모습들이 확인되었다. 이처럼 연구참여자들이 살아온 세월만큼 축적된 지혜로움은 손자녀에게 닿아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연구참여자들은 사회적 지지체계를 통하여 손자녀 양육에 실질적인 도움을 받았으며 구체적으로는 ‘국가 장학금, 교사의 관심, 지역아동센터에서의 돌봄, 손녀 졸업식에 대신 가준 선생님, 사회복지기관의 후원’ 등을 언급하였다.

“우리 작은 애 졸업하는데 우리 작은애는 엄마 아빠 없단 말을 절대 안했어. 친구들이 ‘너 엄마 왔냐?’ 물어 보니까 ‘우리 엄마 올 거야 아직 안 왔어 바쁘니까 이따 올 거야’. 졸업식 때. 그라고 했는데 즈그(저희) 고모가 바빠서 못 가고 그 (공부방) 선생님이 갔는데, 친구들이 엄마냐고 물어보니 ‘응 우리 엄마야’ 그랬다 해. 그 소릴 할 때 어쨌겠소. 그 소리 들으니까 어떻게 짠한가(가엾은가)….” (참여자 H)

한편 중노년기의 연구참여자들에게 사회적 자원과의 연결 시 ‘접근 용이성’과 ‘친밀한 사람의 존재 여부’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고령으로 인한 체력의 약함과 만성질환으로 거동이 힘에 부치는 경우, 또한 이동 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는 경우에는 ‘멀면 가기 힘든’ 상황이 발생하였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이미 라포가 형성되어 있는 사람과 관계하고자 하는 사회정서 선택성 경향에 따라 ‘서로 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언급한 사례가 있어, 사회적 지지체계의 연결 시 고려가 필요하다.

또한 연구참여자들은 손자녀를 돌보는 과정에서 친자녀 키울 때의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 중 매우 엄격한 양육방식으로 자녀를 억압하며 키워 온 참여자는, 친자녀를 키울 때와 비슷한 모습으로 손자를 키우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옛날 방식으로 손자를 대하는 것이 옳을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반문하였다.

“OO이(손자)는 그렇게(엄하게) 안해야겠다 했는데 또 그렇게 키우고 있더라고 저를 보니까. OO이가 커 가지고 성인이 됐을 때 앞으로 20~30년 후에는 어떤 세상으로 바꿔져 있을까. 그때는 또 다른 세상이 올 거다. 내가 상상도 못했던 지금 이 세상을 본 것처럼. 그래서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옛날 방식으로만 이렇게만 고집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좀 들어요.” (참여자 J)

참여자 J는 자신의 고착화된 양육방식에 대해 ‘좀 더 아동친화적이고 사회의 흐름에 따라가는’ 방법으로 바꾸고자 노력하고 있었고, 손자에게 ‘더 다정스런 할아버지, 같이 장난할 수 있는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손자녀 양육자로서의 나를 돌아보는 계기는 자녀사별 후 부모로서의 나를 돌아보며 사별한 자식에 대해 가장 후회가 되고 미안했던 그 지점이 연구참여자들로 하여금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한편, 연구참여자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이 죽은 후 ‘남은 자식들이 손자녀를 끼고 키울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손자녀) 땡겨버리지 않고 잡아 키울 자식’은 주로 손자녀의 큰아빠 및 작은아빠, 그리고 고모로 인식하고 있었고, 특히 친가에서 손자녀를 키우는 경우, ‘고모’는 ‘철철이 조카 옷을 사서 옷장에 넣어주거나, 조카 학교를 직접 찾아다니는 등’ 엄마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막내(고모)가 OO이(손녀) 엄마처럼 하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즈그(저희) 고모가 학원 다 보내주고. 자식 중에 막내가 제일 고마워. OO이 애미(엄마)처럼 해. 서울에 있을 때도 한 달에 한 번씩 내려와서 OO이 옷 전부 사서 딱 정리해놓고. 학원비도 지 통장에서 나가게 해 놓고. 보이기는 메주 같은 놈이 효녀여.” (참여자 B)

반면에 손자녀 양육에 있어 다른 자식들에게 부담주고 싶어하지 않는 참여자들의 마음도 인터뷰 과정에서 드러났는데, ‘법적으로 성인들이고 다 분가해서 살기 때문에, 자기 자식 키우느라 힘들기 때문에’ 부담주지 않으려는 참여자들의 마음이 표현되었다.

“인자(이제) 자식들도 나이 들고 즈그(저희) 조차 자식들 키우고 학교 보내고 뭐 보내고 하는데. 다 즈그도(저희도) 한 짐들이죠. 그러니 나는 알아서 살란다 하고 산디….” (참여자 H)

이처럼 손자녀 키우기에 있어 ‘가족’, 더 구체적으로는 연구참여자가 자식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것에 대하여 상반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이 나타났다. 이러한 인식은 가족체계에 대한 경계지음과 자식으로부터의 지원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따라, 손자녀 양육에 대한 지원을 받길 원하는 유형과 그렇지 않은 유형으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자식의 경제적 지원에 대해 보상보다는 부담의 측면을 강하게 느낀 참여자 H는 손자녀 양육을 홀로 감당해내고자 고군분투하였고, ‘성인이 되어 분가한 자식들’은 양육 도움을 주고받는 ‘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났다고 인식하는 참여자 G의 경우는 자식들로부터의 도움 대신 사회복지기관 등을 통한 사회적 지원책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또한 참여자 G와 H는 공통적으로 80대의 후기 노년기임에 따라 그들의 자식들도 노년기에 진입하는 시기이므로 자식으로부터의 도움을 기대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상황일 수 있다.

(4) 대범주 Ⅳ. 땅을 기름지게 하는 순환적 삶

연구참여자들로부터 돌봄을 받던 손자녀들은 성장하여 청소년기가 되면서 신체적ㆍ정신적 성숙을 통해 연구참여자들에게 도구적ㆍ정서적 지원자가 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농사일을 거들고, 집안일을 도맡으며, 조부모의 건강과 안전을 챙기고, 말벗이 되어주는’ 것을 통해 서로에게 도움 관계망으로서 호혜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특히 친밀하고 의미있는 대상으로부터의 정서적 지지가 그 어떤 지지의 형태보다 중요한 노년기의 연구참여자들에게 있어 손자녀의 정서적 챙김은 생의 의지를 북돋는 이유가 되었다.

“우리 애들이 나 좀 아프면 할머니 뭐 먹지도 못하니까 음식을 작게 잘라준다 하고 할머니 아프면 병원에 갖다 오라하고 항시 그래요. 그런 말 한마디가 고마워요. 뭐 고기 같은 거 혹시 구워서 주면은 꼭 할머니도 같이 먹으라 하고. 느그(너희) 먹어라 나는 이가 안 좋으니까 안 씹어지니까 나는 안 먹을란다 하면 어찌께(어떻게) 밥 숟가락에 떠다 입에 여코(넣고) 그래요 할머니 같이 먹자고….” (참여자 H)

그러나 손자녀의 ‘일찍 철듦’은 연구참여자로 하여금 대견스러움과 고마움을 느끼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안하고 애처로운 마음도 들게 하였다. 이러한 상호 의존성은 조부모-손자녀 관계이기 때문에 더욱 부각되는 특징으로 서로를 향한 연민과 사랑을 더욱 깊게 하는 촉매가 되고 있었다.

연구참여자들의 손을 빌어 점차 커 가는 손자녀의 존재는 참여자들에게 있어 ‘삶의 희망’으로 다가왔으며, 연구참여자들은 손자녀의 건실한 앞날에 대한 희망을 품는 것과 동시에 현재 자신의 삶 또한 희망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참여자들에게 있어 손자녀는 ‘(자식 죽고) 어디 가서 웃어본 적 없는 나를 웃게 하는 존재’이면서, ‘내가 더 건강해야 할 이유’가 되었다. ‘손녀가 받아온 상장에 아픈 데가 싹 사라지는’ 경험과 ‘나 죽고 손녀들 왔다 갔다 할 집을 마련해주고 싶은’ 마음은, 연구참여자로 하여금 ‘힘 닿는 데까지’ 손자녀를 교육 시키고 뒷바라지 하고 싶은 목표, 즉 희망을 갖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아직 미래가 불투명한 손자녀의 존재는 연구참여자들의 자유롭고 편한 삶을 방해하고 의무감에 해야 할 일로 여겨짐으로써 ‘인생의 족쇄’로 느껴지기도 하였다.

“내 새끼 짠한(가엾은) 내 새끼들. 누가 느그(너희) 보고 부모 없다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는가 몰라도 나는 이 세상에서 너희들 밖에 없다. 너희들이 제일 귀하고 제일 이쁘고 제일 짠하고. 느그가(너희가) 아니면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 두고 보기도 아까운 내 새끼….” (참여자 D)

2. 자녀사별 및 손자녀 양육의 일반적 구조기술

60~80대까지 노년기의 전반에 걸쳐 있는 연구참여자들은 삶의 과정 동안 가족 뿐 아니라 주변인들의 죽음을 경험하며 살아왔다. 그들은 유년시절 6.25 전쟁을 겪었던 세대로 전쟁을 통해 일찍이 이별과 상실, 죽음에 대해 경험한 바 있고, 가난했던 시대적 상황과 여성을 교육시키지 않았던 문화적 배경 속에서, 초등학교 졸업 후 학교에 가지 못하였던 열다섯의 참여자는 좁은 다락방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쪼그리고 앉아 미싱일을 하였다. 함께 일하던 청년이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외치며 분신자살하였지만, 그러한 시대적 상실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아픔이었다. 연구참여자들은 건강하고 무탈하게 자라주는 자식들 키우는 낙으로 모두가 배고팠던 시기를 묵묵히 지나왔다.

그러나 홀연히 떠난 자식의 빈자리는 연구참여자에게 참을 수 없는 공백이었다. 자식 앞세운 슬픔과 분노는 연구참여자들을 먹지도, 자지도 못하게 하였고 스스로에 대한 학대와 믿고 의지하였던 신에게 삿대질 하게 하였다. 죽은 자식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약 기운에 의지해 살아가야 할 정도로 약하디 약한 존재가 되어 버린 참여자들. 죽은 자식이 어린 시절부터 살아왔던 고향 땅을 걷다보면 도처에 있는 내 자식의 친구들 보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자식 친구들의 생생한 걸음에 질투가 났고 내 자식 데려간 신이 원망스러웠다. 무엇보다 자식 죽었다고 타인에게 부정적 눈길을 보내는 내 자신이 미워 고향 땅을 떠나왔다. 연구참여자들은 부모와 사별하고 남편을 잃는 것은 자식 죽음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자식 죽음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내려놓을 수 없는 운명적인 형벌이고 ‘자식 앞세운 나’는 수장 당하듯 처절한 고통 속에 있었다.

연구참여자들은 자식 죽은 소식을 주위에서 모르기를 바라였다. ‘자식 잡아먹은 나’는 죄인이고 부끄러웠고 숨고만 싶었다. 자식 장례식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내 얼굴 보이기가 부끄러워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였다. ‘지금 이 장례식은 늙은 나의 장례식이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에 억울하고 분하였다. 형제지간만 불러 조용하게 치른 장례식 이후, 자식 사별에 대해 함구한 채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었다.

자식의 죽음은 아직 작고 어린 손자녀에게도 크나큰 상실이었다. 내 딸 마지막 가는 순간을 지켜보았던 손녀와 엄마 죽던 그 현장에 함께 있었던 손자는 부모의 죽음을 목도하였기 때문에 측은함이 더 하다. 이제 ‘엄마’라고 부를 이가 없는 손자가 불쌍하고 죽은 부모 이야기를 하지 않아 더 가엾다. 속 깊은 손자녀는 할머니 할아버지 마음 아플까봐 죽은 부모 이야기를 일부러 꺼내지 않았고, 연구참여자들 또한 손자녀의 머릿속에서 죽은 부모를 잊게 하려고 입을 다물었다. 사별한 자식에 대해, 떠나간 부모에 대해 서로 말하지 않는 상황은 양자 모두에게 생의 가장 큰 상실인 지점을 건드리지 못한 채 서로를 숨기고 살아가게 하였다.

참척의 고통에 압도되어 있던 참여자들은 주위의 위로와 지지, 스스로의 마음 다스리기를 통해 조금씩 살아갈 힘을 얻었고, 비로소 손자녀의 존재를 통해 모진 시간을 버텨낸 생존자가 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기존의 조부모-손자녀 관계를 부모-자녀 관계로 변화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참여자들은 자신의 생을 좀 더 주체적으로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 이러한 생의 의지는 아프고 늙었지만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내 몸을 쓰며 일하는 시간 속에서 자녀사별의 고통이 점점 옅어지는 것을 경험하였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양육적 성격이 강한 한국의 조부모들은 ‘내가 손자녀를 키우지 않고 다른 집 혹은 시설로 보냈을 때 느끼는 죄책감’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며 부모없는 손자녀를 비교적 쉽게 받아들였으나 양육 초기에는 실제적 어려움들에 대해 예측하기 어려웠다. 중노년기의 연구참여자들은 손자녀 양육을 전적으로 맡으며 양육비용에 대한 부담이 자신의 노후를 위협하는 상황을 겪게 된다. 노후불안과 손자녀를 충분히 교육시키고자 하는 바람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불안정한 노동현장에서 돈을 버는 것은, 앞서 자녀사별의 극복 경험에서 ‘일’이 주었던 긍정적 의미와는 또 다른 측면이다. 만성질환과 힘에 부치는 노동으로 몸이 아픈 것 뿐 아니라, ‘자식 앞세운 사람’, ‘할머니가 키우는 아이’라는 편견어린 시선들로부터 자기 자신과 손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웅크린 삶을 살아가는 연구참여자들은 마음 또한 아픈 상황이었다. 이렇듯 연구참여자 또한 신체적ㆍ정신적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서 손자녀를 충분히 수용하지 못하고 서로 생채기를 내며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연구참여자들은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고 변화하고자 노력하였다. 이것은 손자녀의 더 나은 삶과 가족의 행복을 위한 적극적인 대처이며, 양육자로서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였다. 참여자들은 손자녀와의 긍정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상에서 소소하지만 의미있는 행동들을 하였고, 법적 후견인으로 선임되거나, 학교ㆍ지역아동센터ㆍ사회복지기관 등 공적 지지체계와 긴밀하게 연결됨으로써 손자녀 양육에 힘을 더하게 된다. 또한 손자녀를 키워내는 과정에 자식들이 지원함으로써 힘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손자녀 양육의 부담을 다른 자식들에게까지는 지우고 싶지 않아 홀로 고군분투하는 모습도 발견되었다.

연구참여자들이 자녀사별과 손자녀 양육의 이중적 고통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보다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충분한 애도과정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애도 기간을 충분히 가졌다고 하여 먼저 간 자식을 잊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사별한 자식을 잊지 않고 가슴에 묻은 채 오늘을 살아가는 것은 그 또한 애도의 한 형태였으며, 사별한 자식을 닮은 손자녀의 존재는 마치 물 위에 제 얼굴이 비치듯, 사별한 내 자식을 일상 속에서 문득 떠오르게 하였다. 손자녀의 존재가 죽은 자식을 보여주는 상황은 연구참여자들에게 괴로움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참여자들을 위로하고 손자녀를 내 자녀와 일치시키며 더욱 각별하게 느끼게 하는 힘이 되었다.

이처럼 조부모-손자녀에서 부모-자식의 관계로 재정립된 연구참여자와 손자녀의 관계는, 시간이 흐르면서 어른이 아이를 돕는 일방적 모습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훌쩍 자란 손자녀가 연구참여자의 일을 거들고 서로 챙기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긍정적 관계맺음은 서로에게 살아갈 힘과 근원이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찍 철 들고 성숙해진 아이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연구참여자들에게 애처로움과 미안함의 정서도 느끼게 하였다. 본질적으로 이들의 관계는 부모-자식 간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가 전적으로 어른에게 기댈 수 없었고 상호 의지적인 모습이 부각되었다. 사별한 자식이 주고 간 무거운 선물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연구참여자들은, 잘 자라주는 손자녀의 존재를 통하여 생을 마감한 자녀의 삶이 헛되고 허망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위의 일반적 구조기술을 통해 귀결된 ‘성인자녀와 사별 후 손자녀 양육 경험’의 본질은, ‘물에서 뭍으로 나와 손자녀와 나란히 걸어가는 노우지독(老牛舐犢)1)의 삶’으로 정의하였다. ‘물’의 의미는 연구참여자들이 자녀사별 후 느낀 고통과, 전적으로 손자녀를 키우며 경험하였던 실제적인 어려움을 뜻한다. 연구참여자들은 물속에서 홀로, 혹은 손자녀와 함께 허우적대며 힘든 경험을 하였으나, 도움 관계망의 손 내밈을 통해 ‘뭍으로 나오게’ 되며, 이는 처한 상황과 관계의 변화에 따라 주체적으로 적응하고자 하는 연구참여자의 의지를 나타내기도 한다. 또한 ‘손자녀와 나란히 걸어간다’는 것은, 서로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존재이면서 상호 간에 의지하고 힘을 주는 관계임을 상징하며, 이러한 상호 의존성은 조부모-손자녀 속성이 남아있는 이들의 관계를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노우지독’이란, ‘어미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듯’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 깊음을 나타내는 말로, 연구참여자와 손자녀 관계 속에서 참여자들이 부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온 마음과 몸을 실어 노력하는 삶을 의미한다. 어미가 자식을 핥아주는 모습에서도 물(체액)의 속성은 드러나며, 이때의 물은 젖과 같이 생명을 길러내는 힘의 원천을 상징한다.


IV. 요약 및 결론

본 연구는 성인자녀와 사별 후 손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대리위탁가정의 조부모를 대상으로, 자녀사별 및 손자녀 양육 경험에 담긴 의미와 본질을 탐색함으로써 이들을 돕기 위한 구체적 방안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원자료를 Giorgi의 현상학적 연구방법을 적용하여 분석함으로써 도출된 8개의 대범주는 각각 <운명적 형벌로서 수장된 나>, <발이 묶인 채 더욱 침잠해 감>, <나를 건져주려는 이들과 조우함>, <심해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의미 찾기>, <흐르듯 자연스럽게 나에게로 온 아이들>, <함께 물에 빠져 허우적댐>, <뭍으로 나가기 위한 고군분투>, <땅을 기름지게 하는 순환적 삶>으로 나타났으며, 본 연구를 통해 나타난 성인자녀와 사별 후 손자녀 양육 경험의 본질은 <물에서 뭍으로 나와 손자녀와 나란히 걸어가는 노우지독의 삶>으로 정의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를 토대로 발견한 주요 함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녀사별을 경험한 연구참여자들은 사회적 관계를 자의적으로 축소함으로써 심리적 고통에 대한 조절과 타인의 시선에서 느끼는 부정적 감정으로부터 본인을 보호하려는 모습이 나타났다. 사회적 관계의 축소는 연구참여자들로 하여금 ‘감정의 억압, 숨기고 살아감, 외로움’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야기하였으나, 어떠한 경우는 당사자의 동기가 반영되어 오히려 가족(손자녀)과의 관계가 강화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자녀사별이라는 충격적 사건을 겪으며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전적으로 가족, 특히 남겨진 손자녀에게 선택해 집중하는 모습은, 자녀사별 후 손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조부모들에게 무조건적인 사회활동 강요나 사별 전 수준의 활동성 유지를 강요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애도와 적응과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대리위탁부모의 공동체 활동에 대한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며, 사회적 관계가 축소된 중노년기의 위탁부모들이 상호 간 정서적 지지와 정보교환 등을 통하여 양육자로서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소규모 형태의 자조모임 및 집단 프로그램 등 공동체 활동에 대한 기획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둘째, 사회적 관계를 축소하는 원인 중 하나로 타인의 편견이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적 환경 때문에 죽어간다’라는 말과 같이, 참여자들에게 있어 자녀사별 사건과 그로인해 손자녀를 양육한다는 사실은 남들이 알지 않길 바라는 치부로 여겨졌는데, 이를 촉진하는 매개로 타인의 편견어린 시선과 가벼운 말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식 앞세운 사람’, ‘할머니가 키우는 아이’라는 편견적 시각과 ‘그만 잊어버려, 산 사람은 살아야지’와 같은 위로되지 않는 말 앞에서 연구참여자들은 더욱 위축되며 고립되는 양상이 나타나, 사회구성원들이 편견에 대해 좀 더 민감성을 가지고 상실자에 대한 구체적 도움방법을 교육받는 기회가 필요할 것이다.

셋째, 연구참여자들은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여기는 손자녀들과도 사별자에 대한 이야기를 잘 나누지 않고 있었다. 이는 ‘부모 잃은 가엾은 아이’를 위하는 차원이라고 하였으나, 사별자에 대한 추억을 사별자와 가장 가까운 두 존재(부모와 자식)가 나누지 않는 현상은 모두가 애도의 기회를 상실하는 것과 연관된다. 연구참여자에게 있어 손자녀의 존재는 참척의 고통에 있을 때 생의 용기를 준 고마운 존재이면서도, 아이 앞에서는 사별자에 대한 이야기와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지 못하고 살아가게 하는 ‘야누스’와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가족 의사소통 개입 및 감정코칭을 통하여 조부모-손자녀 간에 보다 원만한 대화와 자기표현이 이루어지도록 촉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넷째, 본 연구를 통해 연구참여자들이 양육자로서 가지고 있는 취약성과 강점이 나타났으며, 특히 체벌에 대해 용인하는 가치관에 대해서는 변화를 도모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사회가 아동권리의 중요성을 점차 더 인식하고 있으며, 현재 민법 915조에 기록된 ‘부모의 아동체벌권’ 항목을 삭제하기 위한 NGO 단체의 범국가적 캠페인이 시행되고 있는 것과 같이, 과거 ‘사랑의 매’로 사회적 수용이 가능하였던 아동 체벌이 현재는 ‘아동에 대한 학대’의 범주에 포함될 여지가 있음에 따라, 대리위탁부모가 체벌 대신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양육기술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부모역할 훈련이 필요하다.

다섯째, 양육 초기 조부모-손자녀 상호 간 생활패턴을 맞춰나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함에 따라 보호체계로 진입한 초기 집중 모니터링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초기 개입의 중요성은 한쪽 부모가 사망한 후 남은 생존 부모가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개입과도 연관된다. 한쪽 부모 사망 후 누가 아이를 키울 것인가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으나 그것을 결정하는 과정에 아동의 의견이나 아동 최선의 이익 원칙이 반영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보호체계로 진입한 후라도 사회복지사는 아동의 생존 부모가 아동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독려하고 가급적 그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촉진하는 개입이 필요하다.

여섯째, 연구참여자들이 언급한 손자녀 양육의 가장 필수적인 지원은 경제적 부분이었으며, 이는 손자녀가 학령기가 되었을 때 교육비 지출의 증가로 더욱 절실하게 느끼는 부분이었다. 초등학생의 경우 방과 후 교육 프로그램이 활성화되어 있으나, 상대적으로 중ㆍ고등의 경우 사설학원 의존도가 높으며 교육비 단가 또한 초등보다 높은 편으로, 이를 지원할 안정적인 보조금과 후원금 지원이 필요하다.

일곱째, 가정이 해체된 경우 아동을 조부모가 키우는 것은 한국적 문화에서 보편적이며 다른 가정이나 시설에 보내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으로 여겨지나, 조부모의 양육력이 취약한 경우나 아동학대가 발생한 경우는 아동을 다른 가정에서 키울 수 있도록 함으로써 보다 안정적인 양육환경을 조성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아동보호체계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는 아동에게 최선의 환경을 제공할 수 있도록 아동보호체계에 관한 통합적인 이해가 필요하고, 아동과 연관된 여러 사람들(친부모 등)과 개입되어야 하며, 법적 측면 및 생애주기별 아동발달과 구체적 양육기술 등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등 역량 강화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이들이 역량있는 실천가로서 일할 수 있도록 체계화된 교육의 기회 및 수퍼비전이 요구된다.

본 연구의 참여자는 공식적으로 보호체계 내에 진입한 사례들이며 실무자들의 도움을 얻어 선정된 참여자들임에 따라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으로 연구에 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후속 연구에서는 비슷한 경험을 하였지만 공식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례에 대해 연구함으로써 이들이 처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더욱 면밀하게 분석하는 과정이 필요하겠다. 또한 본 연구에서는 가정위탁보호가 자녀사별로 기인한 대상자들만 추려 연구를 시행하였으나, 가정위탁보호사유의 가장 주된 원인은 친부모의 이혼과 가출이며, 본 제도의 활성화에 보다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자녀사별에 한정한 연구에서 확장하여 위탁사유별 위탁부모 및 아동이 겪는 이슈에 대해 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Acknowledgments

This paper is a revision and summary of Hye-ji Park’s thesis on her master’s degree.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GS-RPM(Graduate School-Research Planning Meeting), Chonnam National University.

Notes

1) 어미 소가 어린 송아지를 핥아주듯 부모의 지극한 자녀 사랑을 말하며,《후한서(後漢書)》〈열전(列傳)〉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조조(曹操:155∼220) 휘하에서 주부(主簿)를 지낸 양수(楊修)는 재능이 뛰어나고 지혜로웠다. 조조는 촉한(蜀漢)의 유비(劉備:161∼223)와 한중(漢中)을 놓고 싸움을 하였는데, 철수할지 진격해야 할지 곤경에 처하였다. 전투에서 불리해진 조조는 닭국을 먹으면서 닭갈비를 보고 그날의 군호를 묻는 부하에게 닭의 갈비뼈를 뜻하는 ‘계륵(鷄肋)’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하들은 조조의 철수명령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닭의 갈비뼈는 먹음직스런 살은 없으나 안 먹으면 아까운 것으로 버리기 아까운 한중 땅이지만 철수할 결정으로 암호를 계륵이라고 한 것이다. 이에 조조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양수는 군사들과 함께 퇴각 준비를 하였다. 양수의 총명함에 질투심을 느낀 조조는 한중에서 군대를 철수한 뒤 군사들의 마음을 어지럽혔다고 양수의 목을 베었다. 양수의 아버지 양표(楊彪)에게 조조가 “왜 그리 모습이 파리하고 해쓱하냐?”고 묻자, 양표는 “선견지명이 없어 자식을 잘 가르치지 못해 죄를 짓게 했습니다. 아들이 죽고 나니 늙은 어미 소가 어린 송아지를 핥아주는 마음처럼 어버이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을 지닌 슬픔에 해쓱해 졌습니다”하고 말하자 조조는 양수를 죽인 것을 후회하였다고 전해진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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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Research participant

Sort Relation with
grand child
Sex Age Marital
status
Religious
activities
status
Time of
bereavement
Relation with
bereavement
Reasons for
bereavement
Grandchild
character
(age, sex)
A Maternal grand
mother
Female 73 × 2017 Eldest daughter Disease 16 (Male)
B Grand father Male 72 × 2012 Eldest son Suicide 15 (Female)
C Grand mother Female 64 2011 Eldest son Suicide 13·12·9 (Female)
D Grand mother Female 69 × 2011 Eldest son Disease 19·17 (Female)
E Grand mother Female 77 2007 Eldest son Suicide 16 (Male)
F Grand mother Female 65 × 2009 Eldest son Accident 17 (Male)
G Maternal grand
father
Male 87 2007 Eldest daughter Accident 19 (Male)
H Grand mother Female 87 × × 2005 Second son Disease 18·17 (Female)
I Grand mother Female 73 × 2015 Second son Disease 11 (Male)
J Grand father Male 65 2017.2 Eldest son Accident 8 (Male)
K Maternal grand
mother
Female 70 × 2017.8 Eldest daughter Disease 13 (Female)